No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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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 노트(가톨릭대사전)

영성

靈性

〔라〕spiritualitas

〔영〕spirituality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느님과 자기 자신, 이웃들, 그리고 세상에 대하여 자기초월적인 사랑으로 개방되는 한 사람 또는 어느 단체의 믿음이 지닌 살아 있는 표현.

 [어원적 고찰] ‘영성’ 이란 용어는 라틴어의 ‘스피리투알리타스’ (spiritualitas)에서 유래되었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사용한 ‘프네우마’ (πνεῦμα)를 ‘스피리투스’ (spiritus)로, ‘프네우마티코스’ (πνευματικός)를 ‘스피리투알리스’ (spiritualis)로 번역한 것이며, 여기서 ‘스피리투알리타스 가 파생되었다. 바오로의 신학에서 ‘영’ , 즉 ‘프네우마’ 는 ‘육’ (肉, σάρξ, caro)과 반대되는 개념이며, “영적인 사람” 또는 “영적인 것”을 뜻하는 ‘프네우마티코스’는 “육적인 사람” 또는 “육적인 것” (σαρκικός, carnalis)과 대립된다(갈라 3, 3 : 5. 13. 16-25 : 1고린 3, 1-3 ; 로마 7,14-8, 14). 또한 영적이 아닌 사람이나 영적이 아닌 것, 즉 동물적인 것(ψυχικός, animalis : 1고린 2, 14-15)과도 반대된다. 이러한 의미가 점점 발전되어 육체(σώμα, corpus) 또는 육체적인 것(corporalis)이나 물질(mateia)과도 반대되는 개념이 되었다. 사도 성 바오로에게 있어서 “영적인 사람”의 전 존재와 삶은 하느님의 영(Spiritus Dei)의 영향을 받아 인도되고 정돈되어 있다. 반면 “육적인 사람”의 전 존재와 삶은 하느님의 영과 반대된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반대 개념은 비육체성과 육체성 또는 비물질과 물질이 아니라 삶의 두 방식에 있다. 그러므로 각자의 육체와 영혼(anima)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영적인 인간이 될 수 있고, 성령과 반대된다면 자신의 정신과 영과 의지가 육적일 수 있는 것이다.

 ‘영성’ 이란 용어는 5세기경 위(僞) 예로니모 서간 (Pseudo-Jeronymus, Epist. 7 : PL 30 : 114D~115A)에 처음 등장하였다. “그대는 영성에 진보하도록 행위하시오.” 이는 사도 바오로가 제시한 하느님의 영과 연관된 삶의 방식과 일치한다. 이런 의미로 사용되던 이 용어는 12세기에 와서 육체(corporalitas)나 물질(materialitas)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쓰이다가, 현세적 물질의 질서를 의미하는 용어로 변화되었다. 우선 육체와 물질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 등의 저술가들에게서는 바오로의 의미가 보였으나 점점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그래서 교회 행정권을 주관하는 이들에게는 ‘스피리투알리타스’ 를 쓰고, 사회 행정권을 주관하는 이들에게는 ‘템포랄리타스’ (temporalitas)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17세기에 영어와 프랑스어권에서 ‘스피리투알리타스’는 신심 깊은 생활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페늘롱(F. de Salignac de La Mothe Fénelon, 1651~1715), 기용(Madame Guyon, 1648~1717) 등의 저술가들은 정적주의(quietism)와 광신주의(fanaticismn)를 의심하여 이 용어를 경멸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소드로(A. Saudreau, 1859~1946)의 《영성 개론》(Manuel de spiritualité, 1916)과 푸라(P.Pourrat, 1871~1957)의 걸작 《그리스도교 영성론》(La spiritu-alité Chrétienne, 1918~1928)이 출판되어 영성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후 1950년 이래 ‘스피리투알리타스’는 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을 갖기 시작하여 신심, 내적 생활, 영성 생활, 영성 신학 등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스피리투알리타스’ 라는 용어는 가톨릭 교회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과는 의미상 차이가 있지만, 최근 많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다른 종교계 학자들과 세속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뉴에이지 주창자들도 애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교 영성은 이 모든 것을 포용하는 동시에 영향을 주어야 한다. 또한, 적어도 그리스도교 일치 운동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만, 아직 충분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타종교인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는데, 이 경우에 그리스도교 고유의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체험적이든 연구의 대상이든 그들의 종교 전통들을 배제하지 않고 그들의 다양한 영성들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비록 그들이 세력을 떨치는 세계 종교이든 민족 종교이든 그 종교들의 풍부한 영성들은 인정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신적 현존과 초월적 대상, 종교에 따른 의식(儀式) 피조물에 대한 관심 등은 상호 존중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불교 · 유대교 · 이슬람교의 영성에 관해서도 논할 수 있다.

 [중요성] 그리스도교 영성 생활은 단적으로 말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으로서 하느님을 중심에 모시고, 역사 안에서 강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습을 인간에게 제시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의 신비 안에 참여함으로써 삼위 일체의 삶으로 인도되어 꽃피우고 열매 맺는 삶이다. 또한,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 48)라고 말한 예수의 산상 수훈의 가르침을 따라 완덕(完德)에 이르고자노력하는 삶이다. 그것은 하느님이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 주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분을 인생의 길잡이로 삼아 살아가는 삶이다. 한 분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영성 생활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다양한 삶으로 드러난다. 이는 헤아릴 수 없이 풍요로운 그리스도의 보화의 결과로서(에페 3, 8) 일찍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진술한 것처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은 다양하므로 교회의 미(美)와 완덕은 여러 가지로 드러난다. 사도 성 바오로도 그리스도의 신비체 안에 있는 다양한 기능과 역할을 강조하며(로마 12, 3-8), 성령께서 베푸시는 다양한 선물들을 초대 교회의 활발한 체험을 근거로 인정하고 있다〔1고린 12장 ; 다양성 안의 일치(unitas in diversitate)〕. 이와 같이 은총의 작용은 각 개인 안에서 다양하게 드러난다. 또한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각 개인을 통해 드러나며, 역사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성장 · 발전해 왔다. 민족과 언어에 따라서, 그리고 시대의 변천 과정에서 교회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각각 독특하고도 고유하게 발전해 온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면서도 독특한 영성을 꽃피워 풍성한 열매를 맺었으니, 이는 오로지 성령이 베푸신 은총의 풍성한 결과이다.

 복음 삼덕을 바탕으로 교회로부터 공인된 수도 공동체들도 생활 양식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관상(觀想)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회들이 있는가 하면, 활동을중시하여 각종 사도직에 종사하는 수도회들도 많다. 활동 중에서도 주로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수도회들이 있는가 하면, 병원이나 양로원 · 고아원과 같은 복지 시설등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돌보는 삶을 수도 소명으로 하는 수도회들도 있다. 그리고 현장에서 일하는 수도자들과, 가정과 직장을 갖고 깊이 있는 영성 생활을 하는 평신도들도 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다양한 생활 신분에 따라 각각 독특하고 고유한 영성이 있으며, 각 영성은 하느님 안에서 우열의 차이가 없이 그 자체로 고귀하다. 개개인의 삶이 하느님 안에서 고귀한 것처럼 다양한 영성 또한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

 〔영성의 세 단계〕 영성의 단계는 여러 가지로 구분하여 다룰 수 있다.

 첫 번째 단계-개인의 생활 체험 : 이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실제적이며 실존적인 단계이다. 서방 교회 안에서 영성은 성서 신학의 쇄신과 성령론의 자각으로 사도 성 바오로의 개념에서 제시된 것처럼 체험된 생활과 연관되어 발전해 왔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느님 아버지와 부활한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진 성령의 영향을 받고 인도되는 삶으로써, 이는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지닌 사람들로 만들기 위함이다(로마 8, 16-27. 29).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 안에서 진보하여 “우리에게 선사하신 당신(하느님) 은총의 영광을 찬양” (에페 1, 6)하기 위함이다. 성령은 각 개인들과 공동체에 신망애 삼덕을 선물로 주며(1고린 13, 13) 지혜와 판단력(골로 1, 9)과 자유(로마 8, 21 ; 갈라 5, 13 : 2고린 3, 17) 그리고 사랑, 기쁨, 평화, 인내(갈라 5, 23-24)와 같은 성령의 선물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는 다양한 종류의 은사들(1고린 12, 4-11, 28-30 ; 로마 12, 6-8 ; 에페 4, 11-13)을 준다.

 이러한 성령의 선물들과 각 개인이 그리스도와 맺는 신비적 일치는 성령 안에서 영위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모두 교회의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는 의미이다. 즉 말씀과 성사의 거행이 성찬 안에서 극치에 이른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런 그리스도교 영성의 체험적 단계는 전체 인간(육신 · 영혼 · 영)을 포괄한다. 전체 인간이란 끊임없이 변화하는 물질적인 피조물 질서(물리적, 동 · 식물)의 분야로서, 상징적이며 의식적 존재의 전제하에 배우고, 의사소통과 자기 표현을 위하여 언어를 사용하며 개인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각자의 인생 역사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 존재임을 전제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은 사회 · 정치 · 경제적 질서 안에서 봉사하기로 부름받은 존재이다. 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삶 안에서 이런 식으로 각자의 체험 영성을 주제로 삼지는 않는다 해도 그들의 영성은 이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그 주제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의 영성적 중요성은 하느님을 향해 성장해 가는 삶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삶으로 들어간다. 실존적 단계의 영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이 체험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하지만 영성은 간혹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받은 이들에게 적용된다. 이는 그들이 성령 안의 삶을 깊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한계성을 넘어서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며, 그렇게 살려고 할 때 빛을 발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또 다른 경우에 영성은 가끔 하느님과의 일치의 완성 또는 신화(神化)에 관심을 두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기도 한다.

 두 번째 단계-단체 영성과 다양한 영적 전통들 : 성령의 인도를 받아 체험된 영성이 개인적이라 해도 그 체험은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없다. 각 개인은 구체적인 사회에 속하며, 각자의 인간 역사 위에서 그리스도인의 이상을 쌓아 가며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그 이상들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영성의 두 번째 단계는 단체 영성이다. 그것은 우선 가정의 영성을 의미한다. 또 간혹 본당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특수한 단체의 영성, 즉 서방 교회나 동방 교회, 성공회, 루터교, 침례교 등의 영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평신도 영성이나 수도회 영성 또는 꾸르실료, 성령 쇄신이나 다른 신심 운동의 영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단계의 영성은 가르침이나 상징, 의식, 예술적이거나 다른 표현 또는 체험담 등을 확실히 가르치고 심화시키는 것으로 드러난다. 위대한 영성 대가들의 생애나 사상 또는 모범(예를 들면, 아시시의성 프란치스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토마스 머튼 등)은 여러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본을 제시한다. 그러한 영향은 영성 대가들의 생활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장 · 발전된 기록에서 나온다.

 역사적으로 이 단계의 역동성은 여러 다양한 그리스도교 영성과 전통의 부상(浮上)을 의미해 왔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다양성은 성서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사도바오로의 서간 외에 복음서는 예수와 그의 생애와 가르침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마르코 복음서의 강조점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서절정에 이른다. 마태오 복음서는 교회와 산상 설교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심을 둔다. 루가 복음서는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자비에 치중하고, 요한 복음서는 신앙을 불러일으키며 생명과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에게 집중한다. 다른 자료들은 더 많은 관점들을 제시해 준다. 예를 들면, 베드로의 첫째 편지에서 가르치는 내용으로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고 하느님의 백성인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공유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대의 그리스도교 영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왔다.

 각 영성 전통은 복음에 맞는 영성을 형성하려고 하지만, 가르침과 실천 그리고 표현의 양상에 있어서는 복음의 다양한 관점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예수와 그의 복음에 대한 여러 갈래의 성찰이 일어나 초대 교회부터 현대까지 복음의 내용을 수용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다양한 형태의 영성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두 형태는 동방과 서방 교회의 영성이다. 동방 교회는 전례와 그리스도의 부활에 역점을 두지만, 서방 교회는 윤리 규범 · 원죄, 그리스도의 수난에 역점을 둔다. 이러한 두 틀 안에서 서로 다양한 영성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동방에는 시리아와 비잔틴 영성이 있고, 서방에는 독일계와 라틴계 영성이 있다. 여기에 바탕을 두고 역사 안에서 다양한 영성이 생겨났다. 서방 교회 안에서는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 사이에 은총과 선행(善行) 교리, 말씀과 성사의 다른 강조점 그리고 교회론에 따라 상이한 영성이 발전되어 왔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가 열린 자세로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비그리스도교의 여러 영성들을 연구하고 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단계-영성 연구 : 이 단계는 실천적이며 학문적인 영성 연구가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교부들의 영성은 일반적으로 그들의 신학과 혼합되어 있으며, 다양한 성서 지식과 상징, 예형론(tyology) , 그리고 전례 중 설교를 통해 수사학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150~215) · 테르툴리아노(160~223) · 오리제네스(?~254) · 암브로시오(339~397) · 아우구스티노(354~430) 등은 그리스도인들의 개인 생활 증진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내용들을 글로 남겼다. 중세기의 위대한 주석가들인 보나벤투라(1217?-1274)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는 하나의 단편이었으며, 후대에 신학이 교의와 윤리로 구분된 것처럼 명료하게 구분되지는 않았다. 성령 안의 삶에 관한 이론은 그들이 집대성한 신학의 전체 맥락에 혼합되어 있다. 즉 하느님 · 삼위 일체 · 창조 · 그리스도 · 은총 · 죄 · 성사 등과 혼합되어 있어, 영성은 수덕과 기도 생활 등의 주제로 다루어졌다. 그들의 가르침은 성서 주석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성령 안의 삶에 관한 가르침은 뛰어났다. 교의 신학에서 윤리신학이 분리된 이후 윤리적인 여러 사소한 문제들과 의무와 판례들의 강조는 영적 역동성의 신학을 망각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에 대한 반작용에서 영성 신학이 출현하였으며, 이 신학은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으로 구분되어 연구되어 왔다.

 영성 신학의 발전은 좁은 의미에서 기도, 극기, 덕행과 악습, 영적 성장을 위한 규율과 영적 지도에 역점을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성서 신학 · 교부 신학 · 전례 신학이 복구되고 중세기의 위대한 학자들이 이룩한 신학을 종합하며 그리스도인 체험의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영성 신학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현대의 여러 보조 학문(심리학 · 교육학 · 인류학 · 미학 등)들과 여러 인문학(정치학 · 경제학 · 사회학)의 도움과 복잡한 현상들을 성찰한 결과, 영성 신학은 기도와 사회 정의, 여성의 역할, 자아 발견과 개인의 신앙 체험 등도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이는 과거 영성 신학의 주제들과는 달리 상당히 발전된 형태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영성 신학의 경향은 다른 신학 분야와 종교학 및 철학과 다른 인문 과학 분야와의 상호 협력에 있어서 문제로 대두되었다.

 학계에서 영성에 접근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번째는 신앙의 관점에서 보는 것으로, 이는 신앙 체험과 생활 및 공동체 안에서의 역할을 엄격하게 다룬다. 두 번째는 신앙의 관점을 떠나 세속 학문처럼 다루는 방법이다. 이 접근은 많은 대학에서 종교학적 접근을 통해 신앙 체험을 학문 연구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신학적 접근과는 상이한 방법이다. 개인적인 체험과 심리학의 여러 분야와 같은 순수 경험적 자료들은 영성 지도 기술과 영의 분별력을 개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도 있다.

 여러 학문 중에서도 이성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이나 일반 심리학(rational psychology)은 영혼의 본질과 여러가지 기능과 능력의 특성 및 역할, 정서 생활의 법칙, 영혼과 육신의 상호 관계 등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 경험 심리학(experimental psychology)은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현상 또는 병리학적 상태를 체험하고 분석한 결과를 자료로 제공함으로써 이성 심리학을 보완한다. 이런 학문들이 현대에 와서 영성 신학의 보조 학문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심리학적 자료를 사용함에 있어서 두가지 극단적인 것은 피해야 한다. 첫째는, 모든 종교 현상들을 의식의 상태로 격하함으로써 초자연적 현상을 부인하려는 심리주의(psycholgism)이고, 둘째는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로서 모든 종교 체험을 동일시하여 그리스도인의 영성과 비그리스도인의 종교 체험을 구분하지 않는 것이다.

 특수한 학문 분야로서의 영성 : 영성은 신학의 한 특수분야이다. 많은 이들이 신학과 영성을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각 분야의 고유한 전문성을 인정할 때 영성도 예외는 아니다. 영성의 첫 번째 두 단계에서 학문 자료가 보편적인 방법이 아니라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면을 염두에 둠으로써 영성 연구는 구체적인 면에 치중한다. 신학과 영성은 상호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그리스도인 체험을 같은 줄기에서 찾을 수 있다. 신학은 그 체험의 여러 요소를 진단하지만, 영성은 그 체험이 복음을 사는 데 있어서 다양한 강조점에 따라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성서와 역사 그리고 다른 신학 분야들이 전문성을 점점 더 지니게 되자 신학의 여러 분야가 분리되는 위험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영성도 신학처럼 인류학 · 심리학 · 사회학 및 다른 분야들의 전망을 받아들여 시야를 넓혀야 하며, 일치 운동과 타종교와의 대화의 장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학의 여러 분야와 그리스도교의 타학문과 긴밀히 접촉하는 가운데 연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관련에 있어서 근본적인 질문 하나는 개인이나 단체들이 성령 안의 삶에서 일어나는 체험들을 판단하는 규범에 있다. 그 규범은 일반화할 수 없다. 여러 학과들과 긴밀한 접촉을 갖고 있는 신학이 진정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마지막 판단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문제시되고 있는 구체적인 종교 체험들을 식별함에 있어서 신학과 다른 인문 과학들과의 연계하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개인의 체험을 관례에 따른 규범적 태도로 판단하기보다는 서술적으로 정리하여 규범에 맞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영성의 올바른 방향 : 영성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자 학문적인 면에서도 마지막 학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영성에 관하여 이야기하며 타학문과 타종교의장점들을 도입하여 적응하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올바른 판단 기준의 설정이 없는 한, 많은 사람이 ‘선호’ 하고 영원을 향한 인생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도 파멸로 향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올바른 판단 기준은 복음에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으려는 삶의 태도와 건전한 신학, 즉 삼위 일체론, 창조론, 종말론, 성사론, 윤리학,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 은총 · 죄 · 인간 노력의 관계, 그 외 신앙의 모든 신비들, 성령의 선물, 기도와 수덕론 등에 대한 건전한 이론과 인간 구원을 지향하는 건전한 학문에 달려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민족과 종교 환경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제반 문화와 그리스도교 영성과의 접목은 신중하게 검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 수덕 신학 ; 신비 신학 ; 영성 수련 ; 영성 신학 ; 영성 지도)

 ※ 참고문헌 W.H. Principe, Christian Spirituality, The New Dictionary ofCatholic Spirituality, Michael Glazier Book, The Liturgical Press, 1993, pp. 931~938/ A. Solignac, 《DSp》 14, pp. 95~961 M.Dupay, Spiritualité : La notion de spiritualité 14, pp. 1160~1173/ J. Aumann, Christian Spirituality in the Catholic Tradition, San Francisco, Ignatius Press, 1985/ E. Dreyer, The Harpercollins Encyclopedia of Catholicism, Harper San Francisco, A Division ofHarper Collins Pub., pp. 1216~1220. 〔田達秀〕

수덕

修德

〔라〕ascetismus

〔영〕ascet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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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덕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덕을 닦는 것이 수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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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은수자 성 안토니오는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 생활에 힘쓰면서 철저한 극기를 실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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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의 실천은 전통적인 수덕 방법이며, 기도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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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나 힌두교 등 각 종교 공동체들은 수덕의 구체적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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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나 힌두교 등 각 종교 공동체들은 수덕의 구체적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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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은 자기 비움을 통한 사회 구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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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덕은 자기 비움을 통한 사회 구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I . 영성 신학에서의 수덕

 영성 신학이나 이를 실천하는 영성 생활에서 자주 언급되는 용어로, 완덕(完德)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덕을

 닦는 것.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를 통하여 성령의 인도로 ‘완전한 사람’ (마태 5, 48)이 되어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 일치(unio cum Deo)하기 위하여 완덕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영성 신학에서는 이렇게 성숙되어 가는 과정을 정화(淨化)의 길(viapurgativa) · 조명(照明)의 길(via illuminativa) · 일치(一致)의 길(via unitiva)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수덕적인 요소와 신비적인 요소가 있는데, 수덕적인 요소는 죄악을 피하고 기도를 하며 극기 생활을 통하여 덕을 닦는것을 말한다.

 〔신약성서에서의 수덕 사상〕 복음서에서 제시되는 수덕 사상은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의 충실한 제자직에서 요구되는 고통 · 위험 · 불이익 등을 그분과 함께 나누는 구체적인 행위를 전제하고 전개된다. 사도바오로의 서간에서 제시되는 수덕 사상은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에 겸손되이 순종하여 보다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으로, 의식적으로 항구하게 자신을 갈고 닦는 영적 운동 선수 같은 모습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자신의 구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원에 있다.

 복음서 :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직은 수덕적인 자아 포기를 요구한다. 예수에 의해 제자로 부름받은 이는 누구나 자신의 감정과 과거에 맺은 관계를 끊고 하느님 나라에 절대적인 우선권을 두어야 하며, 오직 그분을 따라 나선다는 목적을 향해 매진하여야 한다. 그분의 부르심은 “누가 내 뒤를 따르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사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또한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마르 8,34-35 : 마태 16, 24. 25 : 루가 9, 23-24)라는 말씀에 있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온전한 투신을 요구하며 타인들로부터 받는 경멸과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인간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그리스도를 추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이다(요한 6, 65). 그러므로 세속의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마태 11, 25). 복음서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나서는 삶은 단순히 그분이 행한 것을 모방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 이 아니라 그분과 더불어 그분의 체험을 실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제자직이며 그분의 운명 안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 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복음서에서 제시되는 제자직은 스승인 예수와의 관계를 끊도록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심지어는 그분에 대한 충성심으로 목숨까지 희생할 각오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복음서에서 제시되는 다른 수덕적 주제는 겸손이다. 이 주제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들’ (אֲנִיִּים) 안에 적절히 표현되어 있다(마태 5, 3 : 루가 6, 20). ‘아나빔’ (אֲנִיִּים)들 은 자신들에게 어떤 영적인 필요가 있는지 인식하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힘과 도움을 바라는 신심 깊고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종종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로부터 경 제적으로 억압받고 짓밟히기도 한 그들에게 그리스도는 “복되어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니” (마태 5, 3)라는 첫 번째 진복 팔단을 들려주었다.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마태 11, 29)한 이로서 자신을 표현한 그리스도는 자신 역시 하나의 가난한 사람으로 드러난다.

 사도 바오로의 서간 : 사도 바오로의 서간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한 수덕 사상이 여러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경기장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꾸준히 달리는 육상 선수처럼 자신을 단련시켜야 하는 영적인 운동 선수처럼 묘사되어 있다(1고린 9, 24-27 : 1디모 4, 7). 이러한 노력은 ‘묵은 인간’ (에페 4, 22)과 육체와 그 연약함(로마 8, 12-13) 그리고 ‘권력과 권세(의악신)들,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 천공에 있는 악한 영들’ (에페 6, 12)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데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완덕의 모범인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살기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자신을 비우는 과정에서 겸손과 극기(克己, mortificatio sui ipsius)를 실천하여야 한다. 사도 바오로 자신도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영적으로 훈련된 운동 선수처럼 모든 노력을 경주하였으며(사도 24, 16 ; 히브 5, 14 : 12, 11), 꾸준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일종의 수덕자(修德者, asceticus)였다(필립 3, 13). 사도 바오로의 수덕주의에서 드러나는 다른 면은 수덕의 공동체적인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은 부활하여 영광을받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 안에서 살고 행동한다. 또 그리스도와 신비로운 관계를 맺고 있으며(갈라 2, 19-20)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받은 모든 이들과도 연관을 맺고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하는 것은 무엇이나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도움이 되거나 해를 끼치게 된다. 그래서 개개인의 노력은 사도 바오로처럼 공동체적인 의미가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 수난의 부족한 것을 마저 채읍니다” (골로1, 24)라는 말씀을 실천하게 되는 것이다.

 〔기원과 변천〕 초대 그리스도교의 수덕 권고들 :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로부터 기도 · 단식 · 자선에 관한 기본적인 실천 사항들을 배웠으나 다양한 동기와 형태로 이를 실행하였다. 단식은 의식적인 정화라기 보다는 성덕(聖德, sanctitas)의 성장을 위한 수덕적인 방법이었고, 자선은 그리스도가 가르친 최후의 심판 기준(마태 25, 31-46)과 사랑의 계명(요한 15, 12)을 강조하여 점차적으로 사목 활동으로 발전되었다. 수덕 생활에서 중요한 기도와 성체성사 안에서 반복된 기도들은 공적이거나 사적인 여러 형태의 기도에 보다 큰 의미를 부여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순교와 동정(童貞, virginitas)에 관한 지향이 고조되었다. 순교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에 있어서 완덕의 최고봉으로 여겨졌고, 순교할 기회가 없는 이들에게는 하나의 이상(理想)이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누구나 그리스도와 함께 매일 죽어야 하는 원리가 그리스도인 소명의 근본적인 요구로 받아들여졌으며, 이런 신심은 실제로 순교를 늘 준비하는 생활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극기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그노시스주의(Gnosticismus)와 몬타누스주의(Montanismus) 그리고 마니교(Manichaeismus)의 수행을 본받아 이단으로 흘러가기도 하였다. 물질 세계를 지나치게 경멸하고 혼인을 부정하며 육식을 지나치게 금하며 지나친 윤리적 엄격함과 일부 죄에 대한 용서를 부정하는 경향 등은 모두 이원론에서 연유되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수도자적 수덕주의 : 교회가 확장되자 일생 동안 동정을 지키려는 의지가 신심 깊은 신자들 사이에 커져 갔다. 그래서 동정의 이상과 그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에 대한 서적들이 나와 수행에 대한 가르침과 실행이 발전하였으며, 동정녀들과 수행자들은 지방 공동체의 한 부분을 이루었다. 사막의 은수자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 (250~365)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시리아 · 이집트 ·팔레스티나의 사막에서 수행 생활을 하였는데, 그들은 외딴 곳에서 극기와 기도 생활에 힘쓰면서 사욕 편정(邪慾偏情, concupiscentia)을 완전히 제어한 상태인 무관심(apatheia)의 경지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어느 곳에도 속박당하지 않고 자유로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수행에 힘썼던 것이다. 그들은 음식 · 수면 · 의복 · 숙소 등에 있어서 철저한 극기를 실천하였다.

 그 후 초대 교회의 수덕주의에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일치하거나 보상의 개념으로 고통을 받는 중세기적 개념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역설적으로 313년 콘스탄틴 대제(306~337)의 밀라노 관용령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경시하고 순교 대신 힘든 사막의 생활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이집트에서 공동 수도 생활을 시작한 파코미오(Pachomius, 292~347)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이 공동 생활은 성문화된 규칙과 1명의 원장, 시간에 맞추어 하는 공동 기도, 개인에게 맡겨진 일정한 활동〔所任〕 등이 질서 있게 짜여져 있어 오늘날 봉쇄 수도원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복음 삼덕인 청빈 · 정결 · 순명이 공식적인 서원의 요소는 아니었다.

 파코미오가 주창한 생활 양식은 교회 안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나 결함도 있었다. 우선 이러한 생활 양식을 추구하는 그리스도교 수덕자들은 그리스 · 로마의 이원론적 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교회의 전통적인 가치들과 공존하는 데 어려움을 빚었다. 이들은 비록 격정 · 정욕 · 분노 · 공포 등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아파테이아'(ἀπάθεια)라는스토아 학파의 이상(理想)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추구하였지만, 육체와 영혼의 갈등을 언급한 성서의 가르침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또 이들은 초월적인 것을 지적으로 추구하려고 하여 그노시스(gnosis, 내적 영적 조명)와 이론(theoria,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이상과는 달리, 보다 근본적인 그리스도교 진리를 강조하며 완덕을 의지의 영역으로 보았다. 즉 삶은 활동적인 애덕 안에서 표현된 사랑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종종 물질계를 경시하는 풍조와 신약성서가 강조하는 공동체적인 구원보다는 개인적인 구원에 집착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비교회적인 영성은 개인적 수덕주의를 강조하게 되어 전례 생활을 무시하며 사회 안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사도직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성 바실리오(Basilius Magnus, 329~379)가 시작하고 성 요한 그리소스토모(Joannes Chrysostomus, 347~407)가 지지한 수도 생활은 위에서 언급한 부족한 면들을 보충하는 제도로 등장하였다. 두 성인은 세속을 떠난 수도 생활을 지지하였으나, 떠남은 곧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로 간주되었다. 바실리오에게 있어서 습관적으로 조용한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많은 덕행, 특히 애덕 실천의 장애 요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애덕은 모든 덕행 중에서 타인에게 은총과 지식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요한 그리소스토모는 수도자들에게 팔레스티나에서부터 다뉴브 강 너머까지 광대한 선교 지역을 담당하게 했다. 한편 서방에서는 성 베네딕도(480?~547?)가 직접적으로 사도직을 수행하지는 않았으나 전례를 바탕으로 한 애덕에 기초하여 유럽을 복음화시키는 데 앞장서 나갔다.

 평신도 수덕주의 : 평신도 영성은 비록 초대 수도원 영성의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대단히 영향력 있는 영성이다. 3세기 중엽 데치우스(249~251) 황제 와 발레리아누스(253~260) 황제가 박해를 일으켰을 때 배교자들이 많았는데도 예비 신자들을 위한 세례 지원기 교육 과정이 생겨 개종자들의 교육을 위한 철저한 훈련기간을 두었다. 그것은 성서적 관점에서 구세사와 부활전야의 세례성사에 기초를 둔 것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의 왕국과 암흑의 주권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그 교육은 《디다케》(1, 1-2. 7)와 《바르나바의 편지》(18, 1-20, 2)에 나오는 ‘두개의 길’에 대해 단순하고도 윤리적인 교리 교육을 정교하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4세기에 들어 예루살렘의 치릴로(315~348) · 요한 그리소스토모 · 암브로시오(339?~397) 등은 사탄과 허례 허식 행위를 의식적으로 추방하는 예식을 전례 안에 도입하여 3년 간의 수덕 교육을 실시하였다. 성사 생활 · 기도 · 참회 · 영의 식별 · 자선 행위 등은 마지막 교육 기간에 강조되었으며, 이 과정에는 세례받은 신자들도 참여하여 부활 축제 준비를 하며 쇄신의 기회로 삼았

 다. 또한 수덕의 역사 안에서 이러한 평신도의 풍부한 수덕주의는 수도원 운동에 가려져 빛을 보지 못한 편이었지만, 부활 대축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한 준비로서 사순 시기에 시행된 기도와 여러 가지 수덕 행위는 평신도들에게 중요한 영성적 교육이 되었다.

 〔전통적인 수덕 방법인 극기〕 극기는 그리스도인에게 완덕의 모범인 그리스도를 본받고 따르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온갖 장애물을 극복하는 수덕 행위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완덕으로부터 초대를 받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이며, 성서와 영성 대가들의 가르침에서도 그 필요성이 누차 강조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수덕 생활의 중요한 원리로 제시되어 왔다. 극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우선 인간성 자체에서 기인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영적인 욕구를 지니지만 동시에 원죄의 결과로 인해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 두 욕망 사이에서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분을 떠나 자기 중심적으로 살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극기로써 완덕의 모범인 예수를 본받는 데 있어서 방해되는 온갖 장애물을 제어해야 하는 것이다.

 성서적 용어와 가르침 : 극기란 용어는 성서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구약성서에는 하느님이 주는 시련을 잘 견디어 내고(지혜 3, 5-6), 인내를 다하며(집회 1, 23) 절제하여(집회 37, 27-31) 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는(집회 5, 2) 표현들이 있다. 복음서에도 극기에 대한 직접적인 용어는 피하고 극기를 의미하는 여러 용어들과 관점들을 소개하고 있다. 스승이요 주님인 그리스도는 당신을 따르기를 원하는 이에게 분명히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끊으며(루가 9, 23 ; 14, 27) 포기와 초탈(루가 14, 16. 33), 고통스러운 절단(마태 5, 29-30 : 요한 15,2), 가족으로부터 떠남(마태 10, 29-30 : 루가 11, 21-26), ,회개(마태 11, 20 : 루가 13, 5), 하늘 나라를 위한 정결과 독신 생활의 권고(마태 19, 12),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가르침(마태 6, 24) 등으로 이를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또한 극기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는 것(요한 12, 24-25)으로 비유되기도 하며, 영적 훈련으로 표현되기도 한다(1고린 9, 27).

 극기의 간접적인 표현은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에서 묵은 사람을 벗어 버림(골로 3, 9-10)과 정욕과 사욕을 십자가에 못박음(갈라 5, 24) 등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상호 연관적인 개념으로서 포기(renuntiatio) · 초탈 · 영적 전쟁 · 십자가의 신비 · 금욕 · 심전(心戰) 등의 용어와 함께 영성 신학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도 요한도 간접적으로 극기에 대한 권고를 하면서, 세상과 거기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없어 특별히 완덕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에게는 장애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육체의 쾌락과 눈의 쾌락 그리고 재산에 대한 자랑을 반대하고 경고하였다(1요한 2, 15-16).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극기는 환난을 당하고 극심한 경우에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내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묵시 7, 13-17).

 극기의 본질과 의미 : 라틴어 성서에 나오는 극기(mortificatio)는 ‘죽인다'(mortificare, occidere, percutere)는 의미이다(시편 37, 32 ; 38, 10 : 79, 11 ; 107, 17 : 잠언 19, 9 : 토비 13, 2 ; 지혜 16, 13 : 욥기 5, 18 : 호세 6, 1 : 에제 17, 24 ; 로마 8, 36). 또한 생명의 원리에 있어서, 특히 그리스도교의 인생관에서 볼 때 죽음은 생명과 연관성이 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잘 드러나 있는데, 즉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역설적인 가르침이 그것이다. 생사의 전권을 쥐고 있는 하느님의 역사(役事)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생사의 전권을 쥐고 있는 하느님은 인간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고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하여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자 증거를 드러냈다(요한 3, 17). “그분은 우리 죄를 몸소 당신 몸에 지시고 나무에 오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에는 죽고 의로움에 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1베드 2. 24). 죄에 죽는 이 즉 “육으로 고난을 당한 사람은 죄를 끊었습니다”(1베드 4, 1). 여기에서 극기의 참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극기는 자신을 포기하고 고통을 당함으로써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육체의 욕망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의 욕망은 죽음의 원인(causa mortis)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극기는 회개(paenitentia) · 포기 · 희생(abnegatio)의 의미와 비슷하게 보이지만 구별된다. 회개는 죄에 대한 뉘우침과 사랑을 얻기 위한 개정(改正)의 마음을 의미한다. 포기는 재산의 소유와 그 욕망에서 초탈하여 이것보다 더 높은 것을 추구하고 참된 복〔眞福〕을 얻기 위하여 청빈의 덕을 실천하는 것을 뜻하며, 희생은 인간적인 욕망에 대한 애착(自愛, amor sui)과 집착을 끊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을 섬기고 인간에게 철저히 봉사하며 투신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사람들과 심지어는 자신에 대한 애착까지도 포기하는 것을 말한다. 극기는 육체의 욕망을 죽이기 위하여 영의 인도를 받아 투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의 욕망을 극복하기 위한 싸움과 자발적인 극기까지 포함된다. 이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에 동참하는 삶으로 드러나며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들(갈라 5, 22)과도 통한다.

 극기는 영성 생활에서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되어 사욕 편정과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육체의 욕망은 사도 바오로에 의하면 15개 이상이나 된다(갈라 5, 1. 9-21). 이런 욕망들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원죄의 결과로서 빚어진 악에 기울어지는 경향에 따라 행해지며, 이러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욕망들은 그리스도교적 수행을 어렵게 한다. 사도 요한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은 구체적으로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의 관능적인 욕구와 눈의 과도한 호기심, 그리고 재산에 대한 지나친 애착심으로 드러난다고 전제하면서 이러한 욕망들을 제어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없다고 가르친다(1요한 2, 16). 또한 극기는 인간의 자만심과 분수에 넘치는 지나친 영광의 추구를 절제하여 모든 덕의 기초인 겸손을 실천하게 한다. 나아가 극기는 그리스도인이 완덕의 높은 단계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으로서, 인간의 외적 · 내적 감각과 감성적 욕구까지도 제어하여 이러한 감각에서 유발되는 온갖 좋지 않은 상상을 제어하게 한다. 그리고 하느님과 완전한 합일에 이르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는 마지막 작업으로서, 전통적인 심리학의 분류에 의한 영혼의 두 가지 영적 기능인 지성과 의지까지도 정화할 것을 요구한다. 지성이 정화되면 인간은 신앙의 빛을 받아 사물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올바로 관찰하고 판단하게 되므로 헛되고 무익하며 죄스러운 생각을 모두 거부할 수 있게 된다. 의지가 정화되면 인간은 신앙의 인도를 받은 지성이 제안한 선을 추구하게 되므로 정당하지 않은 온갖 욕망을 제어하여 이상적으로는 피조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 사랑인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게 된다. 따라서 육체적 극기 및 정신적 극기는 인간의 정욕을 제어하고 마음을 비우게 하여 하느님을 수용하게 하는 중요한 방법인 것이다.

 극기의 방법 : 극기를 위해서는 포기와 고행이 필수적이다. 영성 생활에 방해가 되는 것을 반대하여 행하는 것(agere contra)은 극기 실천의 우선적인 과제이다. 인간의 육체적인 욕망이 하느님이 정해 놓은 올바른 목적에 어긋날 경우, 그것에 반대하여 행함은 극기를 요구하며, 재산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탐욕을 반대하여 행함도 역시 극기를 요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좋은 극기의 방법으로 단식을 강조하였고(마태 17, 21 ; 26, 41),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여러분은 영을 따라 거니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육의 욕정을 채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사실 육은 영을 거슬러 욕정을 일으키고 영은 육을 거슬러 (일어납니다). 이들은 서로 반대되어 여러분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갈라 5, 16-17). 그리하여 구체적으로는 단식 · 절식 · 편태 · 철사 줄로 뾰족하게 만든 혁대 두르기 · 맨발 · 구걸(탁발) · 성지 순례 · 유랑 생활 · 밤샘 기도 등과 같이 실제로 육체적인 고행을 통하여 수행하는 방법과 온갖 종류의 모욕과 천시를 참아 받는 정신적 고행 등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도록 권고한 수행 방법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행들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수도원의 규칙을 엄격히 지킴으로써 자신과 세상의 죄악을 보속한다는 가르침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규칙에 따라 사는 자는 하느님을 위해 산다'(Qui regulae vivit, Deo vivit)라는 말이 생겨났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과 영성 대가들의 수덕지침은, 극기의 실천은 언제나 온건하고 지속적이어야하며 기도와 성사 생활과 분리될 수 없음을 가르쳐 왔다.(→ 극기 ; 덕 ; 수덕 신학 ; 영성 수련 ; 영성 신학)

 ※ 참고문헌 Jordan Aumann, Spiritual Theology, Sheed & Ward, London, 1982/ A. Willwol, S.J., Ascèse, Ascétisme, 《Dsp》 1, pp. 936~1010. [田達秀]

 II . 종교학에서의 수덕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져 있는 도덕 능력으로 인격형성의 원동력인 덕(德)을 닦는 것.

 수덕을 유교 전통에서는 ‘수기’ (修己) 또는 ‘수신’ (修身)이라고도 하는데, 신유학 전통 속에서 사는 한국인들은 《대학》(大學)에 나오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 齊家治國平天下)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덕을 닦아서 집안과 이웃과 사회 전체를 평안하게 한다는 인격 완성의 기본 틀과 지향성은 유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전통 들이 공통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 사상에서도 덕(virtus)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습관화된 능력과 탁월한 성품을 지칭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덕 있는 사람을 윤리의 중심에 두었다. 수덕의 핵심은 이기적 자아를 정화하는 과정인데, 이 과정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의식의 정화〕 수덕은 ‘의식(意識)의 정화’ (purification consciousness)를 가져온다. 부모나 스승을 통해 배우는 전통적인 지식은 자기가 경험해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묘사적으로 들어서 저장된 것이다. 이 저장된 지식을 직접 확인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 체험이 필요하다. 수덕이란 실존적 자기 체험을 통하여 전통을 실천하면서 그 안에 잠겨 있는 깊이 있는 층을 깨닫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전통적 상징을 쓰는 긍정적인 길을 통해 오기도 하고, 상징 등을 넘어서 사고와 이미지를 비우는 부정의 길을 통해서 오기도 한다. 부정의 길은 더 철저한 수행을 강조해서 무지(無知)의 구름 · 무심법(無心法) · 무위자연(無爲自然) 등의 부정적 언어를 통해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는 차별 의식을 정화시킴으로써 순수의식 상태에서 절대 진리를 있는 대로 체험하게 한다. 이러한 체험은 집착 없이 고양된 평온함과 순수한 희열 및자유를 누리게 한다.

 순수 의식 상태의 체험은 권세 · 부유 · 미모 · 명예 등 세속적인 가치를 상대화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와 자유를 얻게 되고, 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시각 과 앎을 갖게 한다. 순수 의식의 체험이 유신론과 결합하면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게 되고, 인격성을 초월한 절대 실재나 경지의 획득을 지칭하게 되면 불이 (不二)의 이론으로 발전한다.

 〔순화된 윤리 실천〕 수덕은 순화된 윤리 실천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 전통에 대한 핵심적인 통찰을 자신의 체험으로 직접 확인하였기 때문에 덕을 쌓은 사람은 최고의 윤리성을 증거한다. 불교의 공(空), 곧 무아(無我)의 깨달음은 자비로운 보살의 이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리스도교의 자기 비움(kenosis)은 순수한 사랑과 봉사를 요청한다. 사실 이기적인 자아의 정화를 거치지 않은 극기나 봉사는 오히려 실천자를 자기 만족에 빠지게 하여 참된 사랑의 봉사를 하지 못하게 한다. 착실한 수덕은 일상생활 속에서 사람을 겸손하고 강하게 해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기쁨과 온유함을 갖고 대처하게 한다. 수덕이란 한 인간의 영적 자질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에 외부로 드러난 활동보다 더 중요하고 그 바탕이 된다. 따라서 순화된 윤리 실천을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 각 종교 공동체들은 수덕의 구체적인 과정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 : 불교에서는 이를 위하여 팔정도(八正道)를 가르치는데, 처음 세 가지는 ‘바른 말’ [正言],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 [正命]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비 도덕적인 행위는 무지로서 인간을 제약하기 때문에 의식의 변화를 시도하기 전에 우선 필수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윤리적인 삶은 해탈에서 근본이 되며, 대승 불교에서는 보살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집착하고 번뇌하는 의식의 정화를 위해서는 ‘바른 수행’ 〔正精進〕, ‘바른 사고 [正念], ‘바른 명상’ [正定]을 가르친다. 끝으로 지혜 의 눈을 획득함으로써 ‘바른 봄’ [正見]과 ‘바른 앎’ 〔正思〕에 이르게 된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순수한 지혜와 자비심을 갖추게 되고,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진여(眞如)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번뇌가 없는 자비로운 윤리 행위를 실천할 수 있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보살의 삶이라 고 하는데, 불자들에게 보살 서원은 수덕의 지침이다.

 그리스도교 : 교회의 수덕 신학에서는 순화된 윤리 실천을 위해서 일반적으로 정화 단계 · 조명 단계 · 일치 단계를 제시한다. 정화 단계는 불법적인 죄와 생활을 버려 깨끗이 하는 것이고, 조명 단계는 하느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어 합법적인 것까지도 버릴 수 있게 됨을 뜻하며, 일치 단계란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순명에서 자아의지를 버리게 되고 마음의 순수함을 얻게 된 상태이다. “복되어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마태 5, 8)이라는 말씀은 더러움에서 정화되어 모든 거짓을 벗고 진실하게된 사람의 상태를 지칭한 것이다. 수덕의 최고 단계인 신비 체험과 높은 윤리는 맞물려 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3, 34)라는 예수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되겠기 때문이다. 로이스브루크(J. van Ruysbroeck, 1293~1381)는 마음이 깨끗하게 되기 위해서는 겸손 · 복종 · 자아 포기 · 인내 · 온유등의 덕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했고,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1328)는 덕이 있어야 하느님과의 일치가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ab Avila, 1515~1582)는 인간의 의지를 하느님께 온전히

 굴복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육화의 신학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수덕은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 48)라고 한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

 힌두교 : 참된 윤리는 자신을 아는 지식에 기초를 두고 있고, 자기 신분에 적합한 도덕적 실천은 진리를 향하게 하는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에서는 세 가지 구원의 길이 제시되어 있다. 이 중 행위 요가(Kama yoga)는 지혜요가(Jnana yoga) 및 신애(信愛) 요가(Bhakti yoga)와 더불어 해탈하는 방법으로 중요시된다. 행위 요가란 결과에 집착함이 없이 자기가 해야 될 일을 철저히 실천하는 삶으로, 여기에서의 도덕적 완성은 곧 구원의 길이다. 지혜요가가 소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신애 요가는 이론뿐만 아니라 시 · 노래 · 춤 · 연극 등을 통해 널리 보급되고 대중화되었다. 신애 요가에서는 은총으로 신에게 온전히 신뢰하며 사는 삶이 곧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쳤다. 지혜 요가에서는 경시되던 지상의 현상 세계 역시 환상이 아니라 신의 창조적 힘이요 사랑의 놀이로서, 이 안에서 신은 자신의 모습을 인간에게 보여 주고 있다고 하였다.

 중국 전통 : 다른 어느 종교 전통보다도 수덕을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윤리성의 완성으로써 천리(天理)를 알 수 있고 하늘과 땅의 화육(化育)에 참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온전해진 사람은 곧 성인(聖人)이다. 성인은 천도(天道)와 합일되어 있으므로 덕으로써 백성 을 교화할 수 있다. “자기 마음을 다하면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되고 하늘을 섬기게 된다”(《孟子》, 《盡心》 上 1). 하늘을 섬기는 길은 자기 마음 안에 부여된 도덕성을 실현하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없다고 단정함으로써 수덕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었다.

 유교의 예치(禮治)를 신랄하게 비판한 도교 전통은 무위자연을 가르쳐서 일면 도덕적 인의(仁義)를 소홀히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무위자연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기적 시각에서 남에게 강요하거나 억지로 하려고 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다리는 여유를 중시하였음을 알게 된다. 성인(聖人)은 백성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하며 경쟁함이 없이 모든 이를 키우고, 모든 것이 이루어진 후에는 물러난다.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는 최고의 덕〔上德〕을 지닌 사람을 지인(至人) 혹은 신인(神人) 등으로 불렀다. 이들은 모두 도를 따르고 배워서 도와 하나가 된 인격자로서 최고의 윤리성을 실천하는 완숙한 인간들을 가리켰다.

 〔자기 비움을 통한 사회 구제성〕 수덕은 체험적 성격을 지녀서 대중성을 갖고 자신을 비워 남을 수용하는 사회 구제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우선 수덕은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이론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인층에게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기 정화를 할 마음만 있으면 덕을 쌓아 성인이 될 수 있게 개방되어 있다. 중국 선불교의 성격을 규정한 혜능(慧能, 638~713)은 나무꾼 출신으로 글자를 쓸 줄 몰랐다고 하며, 이슬람교의 대표적 신비가인 라비아(Rabia)는 노예 출신의 여성 시인이었다. 수덕에 깊이 들어가려면 지식의 병폐를 깨닫고 교만을 치료하기 위해서 쌓아 온 모든 지식과 명예와 소중히 여기는 모습들까지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뿌리깊은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슬픔과 무지의 구름 속에서 자신을 비우면서 기다리는 겸허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기나긴 정화의 길을 걸은 후 어느 순간 자아를 깨고 나와서 남과 나를 구별하지 않는 밝은 지혜와 자비로운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선불교에서 진정한 자기를 찾는 10개의 표상인 <십우도>(十牛圖)의 마지막 그림은 사람들이 북적이며 사는 마을의 시장으로 보살로서 돌아오는 장면이다. 아빌라의 데레사가 쓴 《영혼의 성》(Las Moradas o Castillo Interior, 1577)에 나오는 제7 궁방의 마지막 단계에서도 정화의 열매는 순수한 사랑의 봉사이다. 영혼이 일체의 형체를 떠나 순수한 얼로 남아 지음이 없으신 이와 결합되어 묻는 질문은 “주여, 나로 하여금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이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하느님과의 영적 일치에서 실행이 나오는 법이라고 강조하였다. 이 상태에 이르면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은 거의 없고, 영혼은 항상 고요하고 잔잔하다. 황홀한 체험도 없어지고, 두려움도 고독도 괴로움도 없어진다. 고통스러운 일이 생겨도 영혼만은 떠나지 않는 평화를 누린다. 깊은 침묵 속에 즐거움이 있을 뿐이다. 동아시아 전통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모든활동[動]은 고요함(精)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고, 동정을 관통하는 공경(敬)스러움이 삶과 행위 전체에 스며 있는 것이다.

 〔의 미〕 수덕의 실천은 세속화와 개인화 경향으로 가정과 사회가 파괴되어 가는 오늘날, 참으로 필요한 것이다. 서유럽 세계에서 ‘덕의 윤리’ (ethics of virtue)가 다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런 조짐 때문일 것이다. 즉 상식윤리 · 의무 윤리 · 실용적 결과주의의 윤리가 도덕적 주체의 유지에 대해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전통적 수덕 윤리는 주체와 남에 대한 균형적인 관심을 유지해 왔다. 자신의 의식과 윤리 행위와 삶 전체를 정화해서 스스로 덕스럽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키울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해 헌신함으로써 사회를 결속시키고 구제하는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덕을 향하여》(After Virtue)라는 책을 저술한 맥킨타일(A. MacIntyre) 교수가 책의 종결 부분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베네딕도 성인-그러나 물론 매우 다른 형태를 취하는 베네딕도 성인을 기다리고 있다” 라고 한 말은 새로운 형태의 수덕을 실천하는 살아 있는 성인들이 필요한 시대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하겠다. (→ 덕)

 ※ 참고문헌 Ninian Smart, The Purification of Consciousness and the Negative Path, Mysticism and Religious Traditionl Steven Katz, Ethics and Mysticism, Foundation ofEthicsl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l Michael Slote, From Morality to Virtue. [金勝惠]

수덕 신학

修德神學

〔라〕theologia ascetica

〔영〕ascetical theology

수덕적 단계의 기도와 신비적 단계의 기도를 제시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영성 신학의 한 분야로서 수덕 생활의 원리와 그 실천 방법을 연구하는 신학.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을 신학적으로 정립한 영성 신학은 일반적으로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神秘神學)으로 나누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여러분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완전해야 합니다”(마태 5, 48)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 즉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수덕 생활을 하여야 한다. 수덕은 덕을 닦는 것으로서 수련(修鍊)을 전제로 하며, 이는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을 성실히 살아가고 완덕의 모범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하여 방해되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다.

 〔용어 및 개념〕 수덕 혹은 수덕 신학을 가리키는 라틴어는 ‘수련’ 을 뜻하는 ‘아셰티카’ (ascetica)로, 그리스어 ‘아스케인’ (ἀσκεῖν)에서 유래되었다. 이 그리스어는 본래 ‘꾸미다’ , ‘(특히 정신적으로) 장식하다’ , 노동을 하여 준비하다’ , ‘타인으로 하여금 훈련을 통하여 적응시 키게 하다’ 또는 기술, 특히 운동 선수가 필요한 기술을 익히기 위해 신체를 단련시키는 ‘훈련’ 등을 의미하다가 차차 그 뜻이 변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연구하거나 덕을 닦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사도 행전 24장 16절에서 이 용어를 단 한 번 사용하였다. “나 자신은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언제나 거리낌없는 양심을 간직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ἀσκῶ). ” ‘아세티카’ 라는 용어는 그리스어 사본을 제외한 고대와 중세 라틴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다가 교회 안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신비 신학이란 용어와 대조되는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신조어(新造語)이다.

 역사적으로 ‘신비적’ 이라는 말이 18세기에 이르러 ‘예외적인 주입 은총’ 에 한정되어 사용되자, 프란치스코회의 폴란드 출신 신부 도브로시엘스키(C. Dobrosielski)는 1655년에 크라코우에서 《수덕 신학의 개요》(Summarium asceticae theologiae)란 책을 출판하면서 수덕 신학이라는 용어를 신비 신학과 구별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수덕 신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또한 1658년에는 예수회의 쇼레(C. Schorrer) 신부가 로마에서 출판한 《수덕 신학》(Theologia Ascetica)에서 이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수덕 신학이란 대체로 습관인 덕행이 의지 안에서 응답하는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위해 합당하게 작용하는 학문이며, 이에 따라 의지가 항구하고 영구적으로 자기의 목적에 적절히 작용하게 한다” (scientia operandi convenienter SUO fini ultimo, cuirespondet in voluntate virtus, quae universim est habitus, sive constans et perpetua voluntas operandi convenienter SUO fini) . 이 정의는 수덕에 있어서 의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윤리 신학과도 통하며, 그가 다룬 문제들은 현대 영성 신학에서도 그대로 다루어지고 있다. 그전에 예수회의 니그로니오(Nigronius) 신부가 1624년에 ‘수덕 신학 논고 (tractatus ascetici)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1643년에는 니렘베르크(E. Nieremberg)가 ‘수덕 교의’ (doctrinae ascetica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 후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us)와의 논쟁이 일어나면서 ‘신비적’ 이란 용어가 주입관상(注入觀想, contemplatio infusa)이라는 의미로 보다 제한적으로 사용되자 예수회의 스카라멜리(G.B. Scaramelli) 신부는 1754~1755년에 걸쳐 두 권으로 된 《수덕 신비 지침서》(Direttorio ascetico e mistico)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1884년에는 도미니코회의 메이나르(A. Meynard) 신부가 내적 생활에 관한 두 권의 저서 《내적 생활 개론》(Traié

 de la vie interieure)을 펴내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의 차이를 명확히 구별하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영성 신학자들 사이에서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에 대한 정의가 상호 일치되어 있지는 않다. 보통 수덕 신학에서는 정화(淨化, purgativatio) · 조명(照明, illuminatio) · 일치(一致, unitas)의 길을 주로 다루고, 신비 신학에서는 신비적인 현상이나 예외적인 은사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다룬다. 그러나 상호 연관성이 깊고 서로 일치할 때가 많다. 특히 신비 신학은 지속적으로 수덕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며 수덕 생활에 정진하는 이는 어느 정도 신비 현상을 체험할 때도 있다. 또한 두 분야는 그리스도인의 완덕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어느 길을 가던 그리스도인 모두가 완덕의 부르심을 받고 있으므로 성서와 교도권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범위와 특성〕 수덕 신학의 특징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영성 생활의 입문에서 출발하여 주입 관상에 이르는 영성 생활의 과정을 연구한다. 둘째, 통상적 은총(gratia ordinaria)이 각 단계에서 활동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정화 · 조명 · 일치의 길을 탐구한다. 하지만 학자에 따라서는 일치의 길을 신비 신학의 분야로 취급하기도 한다. 셋째, 영혼이 은총과 덕행 상태에서 활동하는지를 관찰하면서 영혼의 능동성에 치중한다. 그러므로 수덕 신학은 습득 덕행(習得德行, virtusacquisita)과 주입 덕행(注入德行, virtus infusa)의 우세에 의해 결정된다. 넷째, 프로테스탄트 신학에서는 수덕주의를 통상적으로 금욕과 극기의 의미로 사용한다. 하지만 수덕 신학과 신비 신학을 구별하지 않고 신심(信心)이나 신심주의(pietsmus) 또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양식’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수덕 신학은 주로 정화와 조명의 길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관한 대표적인 고전적 작품인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가 쓴 《영혼의 성》(Las Moradas 0 Castillo Interior, 1577)에 다음과 같은 기도의 단계가 제시되어 있다. 성녀가 제시한 기도의 아홉 단계는 소리 기도 · 묵상 · 정감(情感)의 기도 · 단순함의 기도· 주부적 관상 · 정적 · 일치 · 순응 일치 · 변형 일치이다. 소리 기도에서 단순함의 기도(prayer of simplicity)까지는 수덕적 단계의 기도이고, 주부적 관상에서 변형 일치까지는 신비적 단계의 기도이다. 아빌라의 데레사에 따르면, 수덕적 단계는 그리스도인이 완덕에 이르기 위하여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기도와 수행에 전념함으로써 점진적으로 그리스도교의 덕행을 쌓아 나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세속적인 욕망과 온갖 유혹을 하느님의 도움과 인간의 의지로 물리치고 겸손과 자아 인식의 과정을 통하여 은총의 도움과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데 까지 올라가게 되는데, 그 최고봉은 단순함의 기도 단계이다.

 첫째 단계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성찰한 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본격적으로 기도와 수덕에 힘쓰기 시작한다. 이 단계는 영적인 무지의 상태 에서 해방되어 세속적인 사고 방식과 영성 생활에 방해되는 온갖 장애물을 극복한 후 아름다운 영혼을 장식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강한 의지로써 지속적인 초탈(超 脫)의 수련을 쌓는 것이다. 그 다음은 ‘묵상’ 의 단계이다. 수덕이 한 단계 진보한 상태로서 영적 싸움이 더 치열하게 전개된다. 악령은 영혼이 후퇴하도록 유혹하므로 마음을 잡고 수덕에 정진하려는 영혼은 혼란에 빠질 수도 있으므로 신앙 안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 즉 인내를 다하여 전진하려고 노력하며 기도와 선행, 좋은 설교나 독서로 예수 그리스도와 친숙하게 지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기도의 특징은 추리적 묵상이다. 묵상이 비록 성찰적이며 지성을 사용하는 기도이기는 하지만 지성이 제시하는 초자연적인 진리에 대한 사랑의 의지적 행위이다. 의지가 사랑의 행위로 발전될 때 영혼과 하느님 사이에는 친숙한 합일이 이루어지며, 이때 영혼은 비로소 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므로 영혼은 지성의 추리보다 사랑이 더 우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더 발전되면 묵상은 단순화되며 의지 작용이 지성의 추리 작용보다 우세한 형태의 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를 영성 신학자들은 ‘정감의 기도’ (affective prayer)라고 한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추리적 묵상을 하게 되며 보다 발전된 정감의 기도로 넘어가게 된다.

 정감의 단계를 거치면 하느님의 현존 의식의 단계로 들어간다. 하느님의 현존 의식이 이 단계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 아니고 이 단계에서 더 깊어진다는 의미이다. 영혼은 수행을 통하여 잠심(潛心, recollection)이나 집중상태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분명히 느낄 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도 그분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는 습득(習得) 기도(acquired prayer)의 마지막 단계이며 수덕적 기도에서 신비적 기도로 넘어가는 변이(變異)가 일어나는데, 이는 단순함의 기도로서,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의하면 ‘습득된 잠심의 기도’ (prayer of acquired recollecion)이다. 이때 영혼은 규율과 극기로 자신을 단련하고 타인에게 애덕을 실천함으로써 삶의 지혜와 신중성 및 생활의 질서를 얻게 된다.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에 의하면 대개 이 단계에서 영혼은 특별히 하느님의 시험을 받는다. 하느님은 영혼을 강하게 단련시키기 위하여 유혹을 주는데 이를 깨닫지 못할 때 영혼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겸손을 다해서 고통을 감수하며 꾸준히 나아갈 때 영혼은 예수의 자비를 입어 높은 단계를 미리 맛보게 된다. 이는 더 높은 단계에 나아가도록 준비시켜 주는 하느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완덕은 맛에 있지 않고 사랑의 강도에 있으므로 보다 큰 덕에 이르기 위해서는 훌륭한 지도자를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이 수덕 신학은 영혼이 본격적으로 수행을 통하여 완덕에 나아가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다루는 영성신학의 한 분야로서 기도 생활과 필수적으로 연관을 맺 고 있다. 수행에 정진함에 따라 기도 생활이 발전한다는 것은 모든 수행자들의 공통된 체험이다. 이는 수행이 순수 인간적인 방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 안에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관상 ; 기도 ; 묵상 ; 소리 기도 ; 수덕 ; 신비 신학 ; 영성 신학)

 ※ 참고문헌 Jordan Aumann, Spiritual Theology, London, Sheed & Ward, 1982/ J. de Guibert, 《Dsp》 1, pp. 1010~1017/ C.A. Bernard, Traitéde Théologie Spirituelle, Paris, Les Editions du Cerf, 1986. [田達秀]

신비 神秘 〔그〕μυστήριον 〔라〕mysterium 〔영〕mystery

 〔용 어〕 우리말에서 ‘비밀’ (秘密, secret)과 ‘신비’ 의 뜻은 엄밀히 구별된다. ‘비밀’ 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일을 뜻하며, 공개 또는 폭로할 경우에는 누구나 알게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신비’ 는 사람의 이성이나 지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영묘(靈妙)하고 기이한 일을 뜻한다. 성서에서 신비는 주로 신적 비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따라서 신비는 계시 · 상징 · 비유 등을 통해서 그 내용이 밝혀지더라도 여전히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는 부분이 남아 있다.

 신구약 성서에는 우리말의 비밀과 신비의 의미에 해당하는 내용이 둘 다 나온다. 인간사와 관련된 비밀이라는 낱말의 의미는 특별히 혼동의 여지가 없으나(시편 44, 21; 잠언 20, 19), 신적인 비밀 즉 신비를 표현하는 데는 용어상의 혼란이 있다. 그러나 히브리어에는 비밀과 신비를 구별하는 용어가 없다. 잠언 11장 13절과 20장 19절 및 25장 9절은 인간의 비밀을 가리키고 아모스서 3장 7절은 앞으로의 역사에 관한 하느님의 비밀을 가리키지만, 히브리어로는 똑같이 ‘소드’ (סוד)가 사용되었다. 이를 《공동 번역 성서》와 《구약성서 새 번역》에서는 ‘비밀’ 이라고 번역하였다. 신적 비밀의 계시에 관한 사상은 주로 묵시 문학에 나오는데, ‘라즈’ (רז)로 표현된 이 신적 비밀이라는 개념이 다니엘서에 9번(2, 18. 19. 27. 28. 29. 30. 47[2번] : 4, 9) 사용되었다. 이를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비밀’ 로, 구약성서 새 번역에서는 ‘신비’ 로 번역하였다.

 그리스어로 신적 비밀 즉 신비를 가리키는 용어는 신약성서에서 정착되었다. 이는 ‘뮈스테리온’ (μυστήριον)이라는 용어로, 신약성서에서 28번 사용되었다. 《200주년 기념 신약성서》에서는 고린토 전서 2장 7절과 요한 묵시록 17장 5절 외에는 이것을 모두 ‘신비’ 로 번역하였다. 반면에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숨은 진리’ (로마11, 25), ‘심오한 진리’ (로마 16, 25 ; 1고린 4, 1 ; 15, 51; 에페 5, 32 ; 6, 19 ; 골로 1, 26. 27 ; 4, 43. 44 ; 1디모 3,9), ‘심오한 계획’ (에페 3, 3. 4. 9), ‘심오한 뜻’ (에페 1,9), ‘신비로운 계획’ (묵시 10, 7), ‘신비’ (1고린 13, 2), ‘진리’ (1디모 3, 9), ‘비밀’ (묵시 1, 20) 등 여러 가지로 번역하였다.

 신약성서에서 사용된 ‘뮈스테리온’ 은 아마도 《칠십인역 성서》에서 차용된 듯하다. 칠십인역 성서에서는 다니엘서 2장과 4장에 나오는 ‘라즈’ 를 모두 ‘뮈스테리온’ 으로 번역하였다. 칠십인역 성서의 지혜서 2장 22절과 6장 22절에서는 이 낱말이 신적 비밀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으나, 집회서 2장 22절, 17장 21절, 27장 16절과 토비트서 12장 7절 및 11절에서는 사람의 비밀을 가리킨다. ‘뮈스테리온’ 은 본래 그리스에서 신비 종교의 비밀 의식(儀式)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던 용어였고, 지혜 서 14장 15절과 23절에 나오는 ‘뮈스테리아’ (μυστήρια)는 그러한 종교적 의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칠십인역 성서에서는 ‘뮈스테리온’ 이 신적 비밀로서의 신비를 표현하는 전문 용어로 정착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신구약 중간 시대 및 신약 시대에 성행한 묵시 문학은 이스라엘의 미래 운명 또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 등에 관한 계시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하지만 신약성서는 칠십인역 성서로부터 ‘뮈스테리온’ 을 차용하여 묵시 문학적 사상과 관련된 종말론적 신적 계시의 내용을 지시하는 전문 용어로 정착시켰다.

 〔구약성서〕 칠십인역 성서에서 ‘신비’ 라는 용어가 신적 비밀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곳은 다니엘서 9군데와 지혜서 2군데뿐이다. 하느님이 꿈 또는 환상을 통해서장차 일어날 일들을 인간에게 알려 주는데, 그러한 정보의 내용을 ‘뮈스테리온’ 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낱말이 단수형과 복수형으로 구별되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다니엘서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에게 제공된 그 특정한 계시의 내용을 지칭할 경우에 ‘이 비밀’ · 그 비밀’ 이라는 의미로 단수형을 사용하였지만(2, 18. 19. 27. 30과 47절의 첫째 것), 하느님이 장차 일으킬일들의 내용을 모두 지칭할 경우에는 복수형이 사용되었다(2, 28과 47절의 둘째 것 : 4, 9[6]은 어법적으로 단수형으로써 복수의 의미를 나타냄).

 〔신약성서〕 복음서에서 ‘신비’ 라는 용어가 사용된 곳은 공관 복음서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석과 관련된 문맥뿐이다(마태 13, 10-15 : 마르 4, 10-12 ; 루가8, 9-10). 제자들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었을 때 예수는 “여러분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마르코)-하느님 나라의 신비들(루가)-하늘 나라의 신비들(마태오)를 알아듣게 해주셨다” 고 대답하였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첫째로 ‘이 비유’ · ‘모든 비유들의 신비’ 라 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 · ‘하늘 나라의 신비’ 라고 한 사실과, 둘째로 마르코 복음에서는 ‘신비’라는 낱말이 단수형으로 사용된 데 반해서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에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예수의 모든 활동과 가르침의 핵심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어떤 비유의 의미를 올바로 안다는 것은 비단 그 하나의 비유에 담긴 내용을 아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나라의 실상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의 기적 행위 속에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는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듯이, 비유로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가 이미 작용하고 있음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란 곧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이다. ‘신비’ 의 단수형과 복수형 중에서 어느 쪽이 전승사적으로 더 근원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 바오로 서간에서도 단수형(로마 16, 26)과 복수형(1고린 4, 1)이 혼용되고 있지만 로마서 구절이 후대의 전승에 속하며 후기 바오로 서간에서 단수형만 사용된 점을 고려할 때, 복수형이 더 오랜 전승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바오로는 사도의 신분을 일컬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느님의 신비(복수형)를 맡은 관리인”(1고린 4, 1)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하느님의 신비는 그리스도교 선포의 내용인 복음과 동의어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 사건이다. 또 바오로가 고린토 교회에 선포한 “하느님의 신비”(1고린 2, 1)도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뜻한다. 로마서 16장 25절에는 바오로가 전하는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와 오랜 세월동안 감추어 두었던 비밀이 완전히 동격으로 병렬되어 있다. 바오로는 로마서 11장 25절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잠시 배척하면서 이방인들을 부르는 데 숨겨진 하느님의 원대한 구원 경륜을 가리켜 “다음 신비”라고 하였고, 고린토 전서 15장 51절에서는 마지막 때에 살아 남은 사람들에게 일어날 몸의 변화를 가리켜 “한 가지 신비”라고 하였다. 고린토 전서 2장 7절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고린토 교회에 전한 구원의 소식을 ‘하느님의 지혜’ 라고 지칭하면서 ‘신비’ · 비밀’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지혜를 수식하였다. 이 지혜는 곧 하느님의 구원 경륜으로서 세례 전부터 마련되어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내용을 가리켜 ‘신비들’ 이라고 하였다(1고린 13, 2 ; 14, 2). 이 두 경우에 ‘신비’ 는 하느님의 구원 경륜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초월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와 인간사에 관한 갖가지 정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신비’ 라는 용어는 후기 바오로 서간 특히 에페소서와 골로사이서에서 비로소 완전히 단수형으로 정착되었고, 복음 · 그리스도 사건 · 하느님의 구원경륜 등을 뜻하였다(에페 1, 9 ; 3, 3.4. 9; 6, 19 ; 골로 1, 26. 27 ; 4, 3. 4). 디모테오 전서 3장 9절에서는 그 용어가 그리스도교 믿음의 내용과 동일시되었으며, 3장 16절에서는 그리스도교 또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생활과 동일시되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에페소서 5장 32절에서는 그 말씀의 문자적 의미 배후에 숨어 있는 유비적 의미를 ‘신비’ 라고 표현하였다. 데살로니카 후서 2장 7절에서는 “불법의 신비”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사탄의 불법이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나타내었다.

 요한 묵시록에는 오직 10장과 20장에서만 ‘하느님의 신비’ 가 ‘하느님의 구원 경륜’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1장 20절과 17장 5절 및 7절에서는 ‘신비’ 라는 용어가 ‘암호’ 또는 ‘상징’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교부들 가운데에서 이냐시오(Ignatius Antiochenus, 35?~110?)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신비’ 라고 일컬었으며(Ad Mag-nesios 9, 2) 마리아의 동정 · 출산 예수의 죽음을 ‘세 가지 신비’ 라고 하였다(Ad Ephesios 19, 1).

 〔의의와 영향〕 구약성서에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비밀과 하느님의 구원 계획으로서의 신적 비밀을 구별하는 용어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칠십인역 성서의 다니엘서에서 비로소 미래의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신비’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본래 그리스 세계의 신비 종교들에서 거행되는 외부인에게 은폐된 종교적 의식을 표현한 말이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이 용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 사건 또는 그것과 관련된 하느님의 구원 경륜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로 점점 정착되었다. 신약성서는 이 ‘신비’ 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인물의 활동을 통해서 나타난 구원 사건을 하느님의 종말적 구원 경륜과 일치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외부적으로는 그리스도교의 구원 소식을 이방 세계 신비 종교들의 비역사적인 구원관에 대립시켰으며, 내부적으로는 그 노시스주의 및 이단들의 몰역사적인 구원관을 경고하였다. 즉 신비 종교에서 유래한 용어를 역사적인 하느님의 계시 사건에 적용함으로써 신비 종교 및 신비 사상의 폐해를 차단하였다.

 하느님의 구원 경륜은 계시를 통하여 알려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결국 ‘공개된 비밀’ 에 속한다. 그것을 ‘신비’ 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하느님 구원 사건의 은폐성을 부각시키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편에서 그 구원 사건의 불가해성(不可解性) 또는 불가사의성(不可思議性)을 고백하는 데 역점을 두는 것이다. (→ 신비 신학 ; 신비주의)

 ※ 참고문헌 R.E. Brown, The Pre-Christian Semitic Conception of Mystery, 《CBQ》 20, pp. 417~443/ ㅡ, The Semitic Background of the Temm Mystery in the New Testament, Facet Books, Biblical Series 21, Phila-delphia, 1968. 〔金昌洛〕

신비 신학 神秘神學 〔라〕theologia mystica 〔영〕mystical theology

신비주의 또는 신비 사상의 내용들을 신학적으로 다루는 신학의 한 분야. 신비 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영성 생활의 회심에서 시작하여 관상을 거쳐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전 과정을 다룬다.

 〔기원과 변천〕 이 용어가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4세기에 안치라(Ancyra)의 주교 마르철로(Marcellus, +374)의 저서에서였다. 그리고 5세기 요한 그리소스토모(347~407)의 제자였던 은수자 마르코(Marcus Eremita)의 작품과 6세기 초 아레오파지타의 디오니시오(Dionysius Areo-pagita)의 저서 《신비 신학》(Περί Μυστικής Θεολογίας)통하여 서방 교회에 도입되었다. 신비 신학을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하여 얻은 하느님에 대한 매우 친숙하고 감추어진 거룩한 지식으로 본 디오니시오는, 그 지식이 오직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파악될 수 있는 지식이나 일반적으로 신앙에 대해서 가르치는 통상적인 이론보다 우월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본래 이 용어를 그노시스(gnosis)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한 듯하다. 따라서 종교적이며 비밀스런 어떤 개념과는 다른 요소, 즉 직관적이며 경험적인 지식의 요소가 이 용어의 의미에 덧붙여진 것 같다.

 그 후 차차 그 의미가 변화되어 관상(觀想, contemplatio)이란 용어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였는데, 이 작품들은 내용 면에서 추상적이고 학문적인 경향을 띠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 디오니시오의 저서들을 통해 알려진 신비 신학이라는 용어가 라틴어로 유입되어 중세 신학자들에 의해 빈번히 사용되었고, 점차적으로 신학자들의 작품에서 기도 특히 관상 기도의 결과인 하느님에 대한 신비스러운 지식과 관련된 신학의 분야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하느님에 대한 지식 자체를 연구하는 실천 신비 신학(practical mystical theology)과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변 신비 신학(speculative mystical theol-0gy)으로 나누어졌다. 이러한 학문적인 체계화에 기여한 대표적인 인물 제르송(Jean Le Charlier de Gerson, 1363~1429)은 신비 신학의 이 두 분야에 대해 명확하게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14세기에 와서 신비 신학은 영성 신학(靈性神學, theologia spiritualis)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신학의 한 분야가 되었다.

 〔범위와 주제〕 수덕 신학과의 관계 : 수덕 신학은 전통적으로 정화와 조명의 길을 다루고, 신비 신학은 신비적인 현상이나 예외적인 은사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다룬다고 보아 왔다. 일반적으로 현대 신학자들도 신비 신학을 수덕 신학과 분리하여 다음과 같이 연구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첫째는, 주입 관상(注入觀想, contemplatioinfusa), 수동적 정화(受動的淨化, passiva purgatio) 그리고 변형 일치(變形一致, transfomatata unitas)의 단계를 연구한다. 둘째, 예외적 은총의 결과인 주입 관상과 가끔 이와 동반하는 부현상(副現象, epiphenomenon)들에 대하여 연구한다. 셋째, 일치의 길을 연구한다. 그러나 정화와 조명의 길은 수덕 신학의 분야로 남겨 둔다. 넷째, 성령의 은사를 받아 활동하는 영혼의 수동성을 연구한다. 신비 신학과 수덕 신학은 상호 연관성이 깊고 서로 일치할 때가 많지만, 신비 신학은 지속적으로 수덕 생활을 하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신비 현상들은 지속적으로 수덕에 정진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으며, 수덕 생활에 정진하는 이는 어느 정도 신비 현상을 체험한다.

 수동적 정화와 완덕의 길 : 신비 체험은 성령의 은사와 깊은 내적 기도 그리고 비정상적인 현상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신비 신학에서 이를 다루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깊은 내적 기도를 통하여 얻어지는 신비체험인 ‘수동적 정화’ 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완덕에 초대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길을 통하여 지상에서 최고의 단계인 변형 일치에 이른다.

 이를 흔히 ‘영적 혼인’ (spiritual marriage)의 단계라고 한다. 여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동적 정화 과정인 감각의 밤과 영(靈)의 밤을 거쳐야 하는데, 신비 신학에서 주로 다루는 것도 이 단계들이다.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체험을 바탕으로 상세히 기록하여 전해 준 이들로는 십자가의 성 요한(Joannes a Cruce, 1542~1591)과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Theresia ab Avila, 1515~1582)를 들 수 있다.

 성녀 데레사가 체험한 다섯째 · 여섯째 궁방(宮房)에 해당되는 것으로 수동적 정화에서 이루어지는 감각의 밤과 영의 밤은 그리스도인들이 상대적인 완덕에 도달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변형일치’ 가 이루어지는 일곱째 궁방과 성덕의 절정인 영적 혼인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느 누구나 예외 없이 거쳐야 한다는 것이 신비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이를 매우 강조한 이유는, 본질상 영혼이 자신의 모든 약점과 비참한 것들을 완전히 정화하기 전에는 하느님과 결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정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수동적 정화에 대해서는 고정된 규정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하느님과 맺는 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느님의 인도함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리고 완전한 정화를 거친 이후에야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룰 수 있고, 그 과정은 길고도 두려운 시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이는 단순히 정화라기보다는 욕망의 정화나 제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감성 면의 결함과 무질서는 모두 영에 그 힘과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고 나쁜 습성들이 뿌리째 정화되기까지는 감성의 반란과 사악이 잘 제거되지 않는다(《어둔 밤》 제2 · 3편). 이러한 정화의 과정이 영의 밤에서 얻을 수 있는 고유한 효과이다.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Las Moradas o Castillo Interior,1577)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수덕적 단계와 신비적 단계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신비적 단계는 주입 관상에서 변형 일치의 기도까지인데, 넷째 궁방에서 이 신비체험이 시작된다. 이때의 기도는 초자연적인 기도로서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위로부터 오는 힘이 있을 때 이 기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는 정적(靜寂, quietas)과 잠심(潛心, recollectio)의 기도가 일어난다.

 정적의 기도는 주로 의지(意志)에 영향을 미친다. 이 기도를 통해 의지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친밀한 인식에 사로잡히게 되고, 육신은 형언할 수 없는 감미로움과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어 관상적 침묵과 휴식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다른 기능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어 열성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다. 영적으로 큰 자유를 누리며 하느님에 대한 자녀다운 경외심과 효성스러움을 지녀 죄를 피하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심이 강하게 일어난다. 또 극기와 고난을 사랑하며, 깊은 겸손과 현세적 쾌락을 무시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모든 덕행에 성장하는 효과를 누리게 된다. 한편 잠심의 기도는 주로 지성(知性)에 영향을 미치며 이 영향을 받은 지성은 다른 기능으로부터 멀어져 오직 하느님 안에만 잠기게 된다. 이런 영혼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현상들이 일어난다. 첫째는 감사로, 하느님께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감사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가짐을 보다 깊게 넓혀 준다. 둘째, 생각을 적게 하고 주님의 현존 안에 잠기면서 깨어 있도록 청원의 기도를 드린다. 셋째,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엇이나 조용하고 평화스러우나, 고통스러운 것은 이기심과 인간의 노력이 가미된 것이므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맡긴다. 넷째, 영혼은 하느님의 영광만을 앞세우고 자신의 이익이나 취미는 포기한다.

 이 단계를 거친 영혼은 한 단계 높은 다섯째 궁방으로 넘어가 하느님과의 합일(合一, commumio)이 이루어지는 주입 관상 기도의 단계에 들어간다. 여기서는 기억과 상상을 포함한 모든 내적 기능이 점차적으로 하느님에게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나 외적이며 신체적인 감각들은 자유롭게 활동한다. 이어서 영혼은 영적 약혼이 이루어지는 여섯째 궁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 단계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더욱더 지배하여 당신의 빛과 위로로 충만하게 해주면 영혼은 탈혼(脫魂)의 경지에 몰입되어 수동적 정화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제 영혼은 자신의 수행으로는 불가능하여 하느님의 몫으로 남겨 놓은 큰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단계에 이른 영혼은 오직한 남성에게만 마음을 두고 있는 처녀가 다른 남성들을 조금도 거들떠보지 않는 것처럼 어떠한 희생과 고통이 뒤따른다 해도 한 번 마음에 둔 그 사람과 결혼하기만을 고대하므로 그 증표로서 하루빨리 약혼하기를 원한다. 이런 영혼에게는 육체의 병이나 타인에게서 오는 속임수, 온갖 험담, 박해, 심지어는 고해 신부로부터 받는 수모도 있으나 마지막 일곱째 궁방에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자 소원이므로 그 모든 것을 인내하며 참아 낸다. 이때 영혼은 기도 중에 황홀감을 맛보기도 하고 말씀(locutio)이나 현시(visio)와 같은 여러 가지 신비 현상을 동시에 체험하기도 한다. 이어서 영혼은 마지막 방인 일곱째 궁방으로 안내된다. 이 방에서 영혼은 그토록 고대하던 소원이 이루어져 사랑 자체인 하느님과 영적 혼인을 한다.

 임금이 있는 그곳은 제2의 천국이며 두 개의 촛불이 하나로 결합되는 곳이다. 빗방울이 강물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이 하느님 안에 몰입되는 영혼도 그와 같이 되어 버린다. 성녀 데레사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영혼이 느끼는 흐뭇한 기쁨은 하느님 곁에 있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하느님이 영혼을 당신께 합쳐 주시면 모든 능력이 마비되기 때문에,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입니다”(《영혼의 성》, 제7 궁방 1, 5). 여기서 온전한 일치 즉 감히 필설로는 표현할 수 없는 변형 일치가 이루어지며, 영혼은 완전한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이는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단계로서 장차 천국에서 누릴 지복 직관(至福直觀, visiobeatifica)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의 높은 단계가 있을 수 없는 그런 상태이다. 여기서 영혼은 삼위 일체 하느님을 지적(知的)으로 직관하고 상호 통교(相互通交)를 나누며 인성(人性)을 갖춘 그리스도와 직접 상봉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이제까지 신앙으로 믿어 온 바를 깨달음으로써 직접 알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여기서 영혼은 모든 고난과 눈물이 기쁨으로 변화되는 것을 실감하면서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그리스도교의 중심 사상을 깨닫게 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사로잡혔던 사도 바오로처럼 “나는 살아 있지만 이미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십니다”(갈라 2. 20)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성녀 데레사는 너무 감격한 나머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곧 그리스도이고 죽는 것이 이익입니다”(필립 1, 21)라는 성서 구절을 인용하였다. 이런 체험을 하는 영혼은 하느님이 만물의 주재자임을 신앙으로 알뿐 아니라 실제 체험을 통하여 깨닫기 때문에 “아, 내 생명의 생명이시여! 이 몸을 받치는 받침이여”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이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요한 17,20-23)을 깨달아 삼위 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게 된다. 뜨거운 사랑의 정신으로 불붙은 영혼은 자신을 전적으로 사랑의 제물로 바치게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로서 사도직에 몰두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관상과 활동은 양분될 수 없으므로 주님과 일치하여 살아가는 영혼은 겸손과 사랑으로써 공동체를 위하여 전적으로 봉사의 삶을 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주입 관상에서부터 신비적 체험이 일어나 순응 일치와 변형 일치의 기도 단계로 상승하는 것은 사랑 자체인 하느님에 대한 사랑의 최고 행위 내지는 극치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므로 이 세상에서도 천상 영광(지복 직관)을 미리 맛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이를 본고향에 이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는”(1고린 13, 12) 상태이며 그분을 닮아(1요한 3, 2)완덕의 보편적 초대(마태 5, 48)가 성취되는 상태이다. 동시에 사도 바오로가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를 원하니···(필립 1, 23-25)라고 한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는 인간의 이상과 염원인 행복이 완전히 충족된다.

 비정상적인 신비 체험과 식별 : 성령의 은사들(1고린 12장)과 비정상적인 현상들도 신비 신학에서 다루어지는데, 이 현상들은 신비가들에게 종종 일어날 수 있는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비정상적인 현상을 의미한다. 그 자체가 성화 은총과 덕행 및 성령의 선물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원인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이러한 현상들은 정상(正常)에 버금가는 현상(paranormalis manifes-tatio)이거나 부현상에 속한다. 또 이러한 현상들은 비정상적인 은총으로서 타인의 선익을 위해 주어지거나 교회의 사명을 이루고자 하느님이 어떤 신비가의 성덕을 탁월하게 공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식별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de Loyola, 1491~1556)는 《영신 수련》(靈身修鍊,Exercitia Spiritualis)에서 선신과 악신의 식별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였는데, 십자가의 성 요한이나 성녀 데레사도 이 점에 있어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교회 안에서도 종종 논란이 되어 온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와 연관되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영의 식별이 필요하며,어떤 경우에는 악령의 작용이나 인간적 영(human spirit)이 선을 가장하여 출현해 사람들을 충동질하기 때문에 더욱 영의 식별이 필요하다.

 영은 하느님의 영 · 악령 · 인간적 영으로 구분되며 각 영의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경향이나 결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영에서 오는 것은 진리 · 신중성 · 계몽 · 순종성 · 분별력 · 겸손 · 평화 · 하느님께 대한 확신 · 순수한 지향 · 극기 · 순박성 · 이기심 없는 사랑 · 그리스도를 모방하려는 열망 등으로 드러나고, 악령으로부터 오는 것은 거짓 · 병적 호기심 · 혼란 · 불안 · 깊은 우울증(의기소침) · 완고함 · 교만과 허영 · 거짓 겸손 · 절망 · 불순종 · 위선 · 감각적 위로에 대한 지나친 집착 · 대의명분을 지나치게 앞세움 등으로 드러난다. 인간적 영은 인간본성을 말하는 것으로, 대개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굴욕 · 보속 · 포기 · 희생 · 극기 등을 싫어하는 경향이 많으며 자기 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이다.

 비정상적인 신비 현상들이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악령중 어디에서 오는지를 정확하게 식별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인 지식도 중요하지만 영안(靈眼) 혹은 신안(神眼)이 열려야 한다. 영안 그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이다. 통상적으로 영의 식별은 결과를 통하여 쉽게 이루어진다(마태7, 15-20). 식별 방법은 신비 현상의 내용이 교리와 윤리에 타당한가, 신비가의 윤리 생활이 정상적인가, 그리고 은사를 받은 사람의 삶에 있어서 진실 · 참된 겸손 · 순종 · 시련과 모함 중에도 강한 믿음과 충실성의 여부 · 거짓 겸손 · 경솔함 · 속임수 · 헌금 강요 등과 신비가의 삶이 기쁨 · 평화 · 사랑 · 정의로운 삶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영적인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 등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적인 식별은 교회의 사명을 유권적으로 해석하는 교도권(敎導權)에 의해 이루어진다. → 데레사, 아빌라의 ; 성령의 은사 ; 수덕 신학 ;신비 ; 신비주의 ; 신학 ; 영성 신학 ; 요한, 십자가의)

 ※ 참고문헌 J. de Guibert, ascetique et mystique, 《DSp》 1, pp. 1011~1014/ 전달수,《신비 체험과 현상》, 가톨릭출판사, 1997/ Jordan Auman,Spiritual Theology, London, Sheed & Word, 1982(이홍근 역, 《영성 신학》, 분도출판사, 1987). 〔田達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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